EXHIBITIONS

배동신(裵東信) 작품전
2019.6.15-7.8(매주 월요일은 휴관)

전시안내- 배동신 작품전 개최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리서울갤러리에서는 65일부터 78일까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수채화가 배동신(1920~2008)의 주요 작품전을 개최한다. 배동신은 한국 수채화의 1세대 선구자로 한국 미술사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할 뿐만이 아니라 세계 미술계에서도 예술성과 가치가 재평가 되고 있는 위대한 작가이다. 배동신의 작품들은 2014년부터 ~2018년에 걸쳐 해외미술경매사이트에서 작품 1점당 수억에서 수십억 원에 낙찰되며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큰 화제를 몰고 오기도 했다.

이번 작품전에는 배동신의 예술세계가 절정에 이르렀던 1960~90년대의 작품들 중 30여 점이 전시된다. 작가를 존경하고 교류가 깊었던 한 컬렉터가 이 시기에 꾸준하게 구입했던 작품들이다. 특히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일체의 격식과 기교를 초월한 물아일체의 정신세계가 표현된 그야말로 수준 높은 경지의 작품들이다.

 

 

전시개요

 

-전시제목: 배동신 작품전

-전시장소: 리서울갤러리(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길 22-2)

-전시기간: 2019615(Sat)~7.8일(Sun) (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시간: 11am-6pm

-전시문의: 리서울갤러리 02-720-0319

 

 

평론발췌

 

<배동신, 호쿠사이와 같은 그림을 향한 광적 집념의 소유자>

배동신은 총체적 인격의 소유자이며 단순함과 순수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예술을 향한 진한 헌신을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이다. 그는 권위주의와 물질적 소유에는 초월한 사람이지만 술친구와 함께 하는 허심탄회한 얘기와 그림에 사로잡혀 무아지경에 이르는 시간을 즐긴다.

- Perry A. Bialor(미술평론가), Korea Herald 1990.3.29 게재 평론 중에서

 

 

<기법과 색감으로 이룬 수채화의 성()>

불모에 가까운 한국 수채화단에 있어서 배동신의 존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가 작가로서 상장한 곳은 일본이란 타국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유럽으로부터 새로이 받아들인 수채화의 기법과 정신을 공부하고 그들과 어울려서 작가로서의 길을 출발했던 것이다.

천성이 솔직하고 깨끗한 그는 물욕을 모르는, 이른 바 에꼴드 파리식의 예술가였다. 따라서 그의 생활은 진정 예술가들이 지니고 있는 순수한 생활의 연속이다.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작품을 만들고, 그러한 작가로서 존재해 왔던 것이다화가 배동신의 작품세계는 한마디로 말해서 큰 규모와 정련된 기술, 그리고 세련된 색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직절적(直截的)이고 대담한 구도라든지 속도 있는 붓의 움직임은 그의 작품의 매력의 원천이다.

- 이경성(미술평론가), 신동아 1973.8월호 중 발췌

 

 

배동신 약력

배동신은 19206월 전남 광주에서 태어나 17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1944년 일본 가와바다미술학교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인 1943년 일본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여 입상하고 이 회의 정회원이 되었다. 해방 후 귀국해 1947년 광주도서관에서 첫 개인전을 가진 뒤 1974년 동경과 오사카 개인전을 비롯 1986년까지 26회의 수채화 개인전을 가졌다.

 

1978년부터 89년까지 서울에서 활동하다 이후 여수로 내려가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광주에서 수채화창작가협회 창립전(초대회장, 1968, 광주)과 황토회 창립전(1970, 여수.순천), 한국수채화협회 창립전(초대회장, 1975, 서울), 1회 중앙미술대상초대전(1978, 국립현대미술관), 1회 서울화랑협회미술대전(1979, 서울문화화랑), 현대미술대전(1983-88, 국립현대미술관), 원로작가초대전(1993, 국립현대미술관), 배동신 수채화 60년전(1998, 광주광역시립미술관) 등의 전시회를 가졌다. 1974년 전남문화상, 1997년 제6회 오지호미술상, 2000년 보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812월 타계하였다.

 

 

 

1990329Korea Herald 평론문 전문

 

배동신, 호쿠사이와 같은 그림을 향한 광적 집념의 소유자

Perry A. Bialor

 

예술가 배동신은 1920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소생했다. 올해로 그의 나이 고희를 맞았다. 일제치하 당시 대망을 품은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이 그도 회화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45년 한국이 해방되고 그는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결혼을 했고 두 딸과 아들을 두었다. 그 후 20년간 그가 그의 예술을 향한 열정으로 젖어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묵묵히 피아노 레슨으로 생활을 꾸려갔다. 젊은 예술가들이 현대 기법을 채택하여 가는 동안 예술은 유행에 편승하지 못하였다. 1974년에서야 처음으로 그의 작품은 서울에서 열린 그룹전에 전시되었고 그의 가족은 1978년에 서울로 이주했다.

배동신은 총체적 인격의 소유자이며 단순함과 순수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예술을 향한 진한 헌신을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이다. 그는 권위주의와 물질적 소유에는 초월한 사람이지만 술친구와 함께 하는 허심탄회한 얘기와 그림에 사로잡혀 무아지경에 이르는 시간을 즐긴다. 후쿠사이와 같이 그는 그림을 향한 광적 집념의 소유자이다.

배동신에게 성공의 화신은 늦게 찾아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생전에 그는 그의 조국에서도 인정을 받는 행운아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배동신은 1943, 1944년 그리고 1946년에 그룹전시회에 참가했었고 그의 첫 개인전은 1973년 도쿄와 타이페이에서 열렸었다. 도쿄에서 첫 개인전 이후 그는 세 차례나 더 개인전을 열어 일본 예술계를 사로잡았다. 일본에서 그는 일곱 차례나 수상 경력을 장식하면서 당당히 거장으로 부상해 갔다.

한국에서 대중에게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선 보인 것은 1974년 가진 갤러리 그룹전에서 였다. 1978년에 그는 국립미술관에서 개최한 초대전에 참여했고 이때 그의 가족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1979년에 발간된 초대형 (회화 및 조각분야) 일백인선집에 망라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980년 국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그의 수채화배동신은 한국 예술가로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보기 드문 사람이다. 비록 서양화풍의 화가이긴 하나 그는 오로지 수채화만을 고집한다. 게다가 그는 파리 학풍에서 영향을 받고 일본 화풍을 통해 조정된 특이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인터뷰를 통해 이 예술가는 만일 유화가 육식에 비유될 수 있다면 수채화는 채식이라 할 수 있죠라고 하면서 유화가 동적이며 극적인 감동을 연출한다면 수채화는 상큼하고 은근한 아름다움을 전해줍니다라고 덧 붙였다. 배동신의 부드러움과 투명한 성격이 잘 중재된 그의 화풍에 반영되고 있다. 배동신은 그의 화폭에 담기는 소재를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선택하고 제한한다. 주로 풍경을 담는 중에도 그는 무등산을 수없이 그려냈다. (무등산은 광주를 감싸고 내려다보는 거대한 실물이다) 마치 세잔느가 세인트 빅토리산을 흠모했듯이 그는 무등산을 사모했다.

또한 그의 소재는 목포항이었고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접시에 담긴 사과들 여성의 흉상. 전신상 (서구스타일의 옷을 입고 하이힐 구두를 신은 모습을 종종 그린다) 그리고 가슴이 몹시 클로즈업된 누드로 이어진다. 배동신은 한 점의 수채화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수백 장의 스케치와 초상을 그려낸다. 한국의 어떤 화가도 그의 끝없는 습작과 준비 작업을 따르지 못 할 것이다. (매일 2-3시간씩) 배동신은 커다란 동양화 붓을 이용하여 빠르고 직접적인 공격을 선호하는데 특히 외광에서 그려지는 풍경화는 더욱 그렇다. 그는 그의 작품 속에 무한한 자유를 불어넣는다.

그 자유는 채색된 필치와 각진 선들이 화폭 전체에 널리 퍼지면서 중복되고 겹쳐진 투명함들이 안개처럼 표현 되도록 이끌어 준다. 아낌없이 분출되는 단호한 선들은 수채화법이 되었다. 광주와 함구를 그린 많은 작품들은 이러한 단편적 비전과 시각적 충만함을 전시하고 있다. 그의 색채는 대개 침묵하고 있다. 가끔 고밀도에 이르기도 하는데 자주 빛 갈색, 자주빛 노랑과 빨강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밝은 색깔들은 단순히 지역적 의상의 표현이라든지 그의 초상화들은 표현주의적 성향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들이다. 채색된 필치는 하나의 형태를 구성한다.

최근에 제작된 누드화는 넓게 퍼진 붓질과 엷은 채색들로 표면이 짜여 있는데 그러한 누드화외에 그는 명암을 표현하지 않는다. 기대에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의 커다란 누드화는 결코 아름답지는 않다. 그들은 커다란 젖가슴과 두꺼운 허벅지를 내 놓고 있는데 그것들은 마치 무등산과 같은 자연 현상에서나 볼 수 있는 대 걸작의 풍을 느끼게 해 준다.

누드화의 표면들은 선들과 색채의 상처와 분방함이 있는 듯한데 그 속에서는 화강암의 표면에서 뿜어 나오는듯한 생명력을 맛볼 수 있다. 그의 개인적인 원색법 속에 거대한 산이 재현되고 있는 듯한 것이다.

1957년 이래 야심에 찬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은 전위주의자로서 그리고 서구의 보조에 발맞춰 나가는 최신식의 스타일을 추구했다. 그들은 전통주의나 사실주의의 그리고 파리 학교 스타일의 잘 다듬어진 그림을 배격했다.

그러한 움직임은 1957년에 강렬한 추상주의와 기하학적 추상주의와 더불어 시작되어 이것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축소주의 및 대중예술과 함께한 단색화 법으로 이어졌으며 마침내 1990년대에는 찬색조의 추상주의와 개념주의로 발전해 가면서 오로지 대중예술만이 너무나 이질적인 것이라 모방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1975년 조선일보사에서 후원한 연례 서울 현대 예술축전이 개막되면서 대중의 관심이 고조되었다. 각각의 시대적 움직임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유래되어 왔는데 전통문화와 사회적 메시지를 내포한 사실주의를 재발견하고 이것을 대중을 위한 예술로서 감지하여 한국의 진정한 현대주의를 찾는 데에 15년이 걸린 셈이었다.

전위주의의 영향에 의한 독단적인 현대주의가 다양화되면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 나간 것이었다. 이것은 배동신의 묵묵한 주장에 공감대가 이룩된 것과 같았다. 배동신의 예술은 전기향을 통해 진정한 자신의 목소리와 색깔을 지닌 채 하나의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쓴이: Perry A. Bialor-뉴욕의 예술 평론가로서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 코리아 헤럴드를 비롯하여 수많은 지면에 문화면 기사를 기고한바 있다.

번역: 김수정-보스톤 대학원 영문학 석사